겨울 시모음
겨울은 계절 가운데서도 유독 언어를 조용히 만들고, 마음을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시간입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매서워질수록 인간의 감정은 외부보다 내부로 향하며, 그 과정에서 시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 됩니다. 겨울 시는 단순히 차가운 풍경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다림과 상실, 약속과 기도, 삶의 유한성과 희망을 동시에 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겨울 시모음을 중심으로, 각 작품의 전문을 온전히 감상하고, 시마다 감상평과 해설을 덧붙여 겨울이라는 계절이 시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같은 시인의 작품은 묶어서 시인 프로필을 정리하여, 작품과 작가의 맥락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이해인 - 겨울 편지, 겨울 노래
이해인의 시는 겨울을 차갑고 고립된 계절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은 마음을 정화하고, 그리움과 기도를 맑게 가다듬는 시간으로 제시됩니다. 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관계와 사랑을 매개하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겨울 편지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되는 눈 오는 날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본다
이 시에서 겨울은 거리의 계절입니다. 시적 화자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대를 떠올립니다. 산, 바다, 장독대처럼 일상과 자연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은 그리움이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에 스며 있음을 보여줍니다. 눈사람이라는 표현은 그리움이 쌓여 형체를 얻는 과정을 상징하며, 눈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마음은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 시의 겨울은 외로움보다는 따뜻한 그리움에 가깝습니다.
감상평과 해설
겨울 편지는 질문으로 시작해 이름을 부르는 행위로 끝납니다. 이는 거리와 침묵을 넘어 관계를 확인하려는 시도의 구조입니다. 눈이 소리를 죽이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시 속의 목소리는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이해인은 겨울을 통해 말 없는 소통, 조용한 연대를 이야기합니다.

겨울 노래
끝없는 생각은
산기슭에 설목(雪木)으로 서고
슬픔은 바다로 치달려
섬으로 엎드린다고해소에 앉아
나의 참회를 기다리는
은총의 겨울더운 눈물은 소리없이
눈밭에 떨어지고
미완성의 노래를 개켜 들고
훌훌히 떠난 자들의 마을을 향해나도 멀리 갈길을 예비한다
밤마다 깃발 드는
예언자의 목쉰 소리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다듬이질하는 겨울
이 작품에서 겨울은 신앙적 의미를 강하게 띱니다. 설목, 고해소, 참회, 은총 같은 단어들은 겨울을 자기 성찰의 계절로 만듭니다. 슬픔은 바다로, 생각은 산기슭으로 흘러가며 자연 속에 흡수됩니다.
감상평과 해설
겨울 노래의 핵심은 준비입니다. 떠난 자들을 향해 미완성의 노래를 접어 들고, 자신의 길을 예비하는 태도는 삶의 유한성을 인식한 자의 자세입니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고통조차 다듬는 도구가 됩니다.
이해인 시인 프로필
이해인은 한국 현대시에서 종교적 감성과 일상의 언어를 결합한 대표적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계절과 자연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화를 이야기하며, 특히 겨울을 고독이 아닌 은총의 시간으로 재해석하는 데 강점을 보입니다. 서정적이면서도 단정한 언어는 독자에게 위로와 사유의 여백을 제공합니다.

김현태 - 겨울 약속
김현태의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약속은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은 화자는 눈과 함께 시간을 견뎌냅니다.
겨울 약속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했던가요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간직한다고
우리가 나눈 것은 차라리 사랑이라고
그대가 남기고 간 눈빛 하나에
나는 여태 오도 가도 못하고
겨울나무 곁에 서성입니다함께 나눈 나날을 돌이켜 보면
눈물에 투영된 그대 모습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약속 때문이겠지요첫눈이 오면 다시 만나자고 한
그대도 없이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강가에 내려 앉은 산 그림자마저
겨울잠을 자는데 그대는 오지도 않고
나는 또 한 그루 겨울나무가 되어갑니다
감상평과 해설
이 시에서 겨울나무는 정지된 존재입니다. 움직이지 못한 채 약속의 자리를 지키는 화자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첫눈은 희망의 신호였지만, 결국 약속은 오지 않고 시간만 쌓입니다. 김현태의 겨울은 서늘하지만 과장되지 않으며, 기다림 자체가 삶의 한 상태임을 담담히 보여줍니다.
김현태 시인 프로필
김현태는 인간관계의 미세한 균열과 감정의 잔여물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서 겨울은 극적인 비극이 아니라, 지켜지지 않은 말과 남겨진 마음이 머무는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박남준 - 겨울 풍경
박남준의 겨울은 생활의 계절입니다. 눈과 추위 속에서도 빨래를 하고, 호박죽을 끓이며 하루를 이어가는 삶의 구체성이 중심에 놓입니다.
겨울 풍경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 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집 저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 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감상평과 해설
겨울 풍경은 삶과 죽음, 노동과 사유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시입니다. 빨래와 호박죽은 생존의 행위이자 사유의 계기입니다. 겨울은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하게 하지만, 동시에 따뜻한 품안이 될 가능성도 남깁니다. 박남준은 겨울을 통해 삶의 물성을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박남준 시인 프로필
박남준은 농촌과 일상의 언어를 통해 존재의 문제를 사유하는 시인입니다. 그의 시에서 겨울은 철학적 사유의 배경이자, 생활의 리듬이 응축된 시간입니다.


김남조 - 겨울 바다
김남조의 겨울은 고통과 기도의 계절입니다. 바다는 차갑고 깊으며, 그 속에서 인간은 시간을 배웁니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감상평과 해설
겨울 바다는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미지의 새는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시간과 인고입니다. 김남조는 겨울을 통해 고통을 견디는 자세와 기도의 깊이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김남조 시인 프로필
김남조는 인간의 내면과 신앙적 성찰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시인입니다. 그의 겨울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해 영혼의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김현승 - 겨울나그네
김현승의 겨울은 떠남의 계절입니다. 정착보다 이동, 소유보다 비움을 택하는 존재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겨울나그네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나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길을 떠나리라.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쟁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 해의 낙엽들같이낯설고 친절한 처음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의 기적소리 기적(奇蹟)처럼 울려와
땅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감상평과 해설
겨울나그네는 침묵과 이동의 시입니다. 말은 줄어들고, 몸은 겨울옷 속에서 무거워집니다. 김현승에게 겨울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더 멀리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김현승 시인 프로필
김현승은 고독과 초월의 언어를 구축한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겨울은 외부의 추위보다 내면의 단단함을 강조하며, 침묵 속에서 존재를 사유합니다.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의 겨울은 사랑과 가난, 순수의 계절입니다. 눈은 세상을 덮어 지우고, 둘만의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감상평과 해설
이 시에서 겨울은 도피이자 선택입니다. 눈이 쌓일수록 세상은 멀어지고, 사랑은 또렷해집니다. 백석은 겨울을 통해 가난한 사랑의 존엄을 선언합니다.
백석 시인 프로필
백석은 한국 현대시에서 독보적인 언어 감각과 서정성을 지닌 시인입니다. 그의 겨울은 낭만적이면서도 결연하며, 세속을 떠난 자리에서 인간적인 사랑을 끝까지 붙잡습니다.

결론
겨울 시는 추위와 고요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견뎌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해인의 겨울은 기도와 그리움이고, 김현태의 겨울은 약속과 기다림이며, 박남준의 겨울은 생활과 사유입니다. 김남조는 인고의 바다를, 김현승은 침묵의 길을, 백석은 사랑의 눈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이처럼 겨울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각 시인은 자신만의 겨울을 통과하며, 그 과정에서 삶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독자는 이 시들을 통해 차가운 계절 속에서도 따뜻한 언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